▲ 이현수 논설위원

바람이 분다. 하루 온종일 미세먼지로 희뿌연 하늘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이런 날은 황홀하게 내려주는 눈을 기대하였는지도 모르겠다. 24절기 중 대한인 오늘, 종일을 기다려도 눈은 오질 않았고 황량한 바람만 유리창을 두드릴 뿐 끝내 눈은 우리를 찾지 않았다. 어스름한 어둠을 따라 눈발처럼 창을 두드리는 바람은 낮 동안 내가 지나온 기억들을 더듬게 한다.

어둠 스며든 도로를 횡단하던 가슴은 풍경처럼 앉혀진 논과 밭을 연결하는 콘크리트 다리 위에 멈추어 섰다. 발아래 펼쳐진 그림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짧은 사색에 잠기어도 보았다. 함께 문학을 했던 작가들이 그립고 혼자만의 생각이 많은 날. 스치는 것은 온통 바람 소리뿐 차창에 갇힌 모과 향만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길을 따라 가볍게 흐르는 강 끝 어딘가에 알만한 이름으로 새겨진 이정표가 붙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길 100선 중 하나라 명기된 강둑으로 발길을 옮겨보았다. 둑방길을 따라 비스듬히 꼬부라진 길에 언젠가 동인으로 함께했던 잘 아는 시인의 시비가 새겨져 있어 보는 내내 괜스레 숙연해지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문단에서 반복되어지는 적폐는 아직도 만연하다는 생각을 시비 앞에서 하게 되어 마음 씁쓸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제는 표절로 문단 다섯 곳에서 수상을 하고 유명 작사가의 노랫말까지 표절하여 디카시 공모전에 제출하였다가 취소된 사실이 밝혀져 문단이 시끄럽다. 상이라는 폐단이 가져다주는 문제이기도 하고 자격미달의 신인을 문단운영차원에서 회원확보하려는 일부 문단의 운영방식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문단의 문제로만 해석하기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신인 응모자의 자세가 결정적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20여 년 전,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서 ‘떠난 혼을 부르다’라는 작품이 당선 후에 오정희 선생의 글을 표절한 사실이 밝혀져 뒤늦게 당선 취소된 사실이 있다. 이후로도 많은 문제가 있어왔지만 우리 스스로 아직 그 해결을 다 하지 못한 셈이다. 심사위원들이 미쳐 다 밝혀내지 못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기엔 응모자의 도덕적 양심이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결국에는 독자라는 최종 심사자의 눈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 표절이고 도용의 문제이다. 문단 내부의 권력에 의해 쉬쉬해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문단 내부의 적은 문단을 지키는 운영자의 이정도야 뭐 하는 안일함에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성추행 문제로 문단에서 퇴출된 노령의 시인이 버젓이 타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고 필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아직은 우리 문단 내부의 적은 외부에 있음이 아님을 알았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문제를 문단 지도부가 모를 리는 없겠지만 인정상 덮어주는 무던함으로 제2 제3의 피해자는 또 발생할 수 있음을 그들은 왜 모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바른 생각, 바른 문단 운영으로 독자들로부터 외면받지 않는 한국문단의 틀이 새롭게 정립되는 해였으면 좋겠다.

밤이 어둠을 몰고 오는 시간, 회귀본능의 반사작용처럼 또다시 지나온 과거들이 저녁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문학은 시대를 대변하고 역사의 줄기를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식인들의 펜에서 움직이는 사상과 생각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다져온 문인들의 꿋꿋한 행보를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난 문단의 시계는 쉬이 되돌릴 수 없는 꿈들이다. 날마다 가슴 떨리는 기분으로 시를 대하고 문학인을 지성이라 칭하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문단의 위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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